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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 : 북경네번쨰

깊은샘1 2007. 4. 20. 17:48

천단공원

명. 청조를 통하여 황제가 오곡풍양(五穀豊穰)을 하늘의 신에 기도하던 곳이란다. 그 후에 청의 건륭황제 때에 개축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되었다고 한다. 고궁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 일단(日檀), 월단(月檀), 천단(天檀), 지단(地檀)이 대칭 위치에 있다. 북에서 남으로 기년전, 황궁우, 원구 등의 주요한 건물이 직선에 나란히 서 있다.

•원구단
이곳은 황제가 하늘에 기도하는 곳으로 매년 동지에 재궁에서 수신재계한 황제가 여기에서 하늘에 기도하였단다. 원구단의 한가운데에는 황제가 기도를 올리는 원심(圓心)이라는 둥근 대리석 판이 있는데, 그 곳에 서서 소리를 지르면 자기의 귀에만 크게 반향음이 되돌아 오는 음향현상이 있다고 해서 우리도 해보았는데 들리지 않았다. 가이드 말로는 여기저기서 들리는 소리때문이라고 했다.
•황궁우
역대 황제의 위패를 모셔 둔 곳이란다. 이곳은 회음벽(回音壁)과 삼음벽(三音壁)이 유명하다. 회음벽은 황궁우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담으로 속이 비어 있다. 그래서 담을 향하여 소리를 내면 반대쪽의 담에 선 사람에게 들린다고 한다.
•기년전
3층의 원형 기단 위에 우산을 편듯한 3층 지붕인 원형건물이다. 높이 38m, 직경30m이다. 이곳에서 황제가 오곡풍년의 제례를 행하였다고 한다.

 

아침 일찍 천단공원에 왔다. 이곳의 건물은 거의 둥근 모양이다. 엄마 말씀으로는 하늘 = 둥글다 이고, 땅 = 네모다 라는 관념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그런 것들이 발견된단다.

 

이곳에는 북경 사람들이 아침 일찍부터 와서 운동을 많이 한다더니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만큼이나 다양한 운동을 하고 있다.

아빠가 가끔 보시는 무협영화에서 나오는 (엄마는 중국사람들이 허풍이 세서 무협영화를 좋아하지 않다가 역사를 읽으면서 잠깐이지만 이곳에 와서 꼭 과장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태극권을 하는 사람,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는 사람, 기공을 하는 사람, 검무를 추거나 마작을 즐기는 사람(영화에서 봤는데 실제로 보니까 재미있다),제기차는 사람 등 진짜 운동을 많이 하고 있다.  진짜 중국사람 모습인가 보다. 그리고 중국사람들이 여유가 있어 보인다고 했더니 가이드 말이 공산주의 국가여서 기를 쓰고 돈을 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거라고 했다.

 

중국의 땅은 넓기도 하다. 이곳도 들어오는 문과 나오는 문이 다르고 여러곳에 문이 있단다. 자금성의 몇 배라니 우리는 다 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천단의 중심선은 자금성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했는데 측량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그 시대에 정확하게 측을 맞춘 사실이 놀랍다. 인간의 의지는 놀랍고도 신비로운 면이 많다.  

 

서태후

(고집스럽고 무섭게 생겼다)

 

서태후를 알기 이전에 청나라 황실제도, 후궁제도에 대해서 조금 알 필요가 있다고 엄마가 간단히 이야기 해주셨다.

중국의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이 세운 국가가 아닌 소수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나라가 청나라다. 만주족은 초기에 ‘금’ 이라는 나라로 오랫동안 중국 변방의 국가로써 있다가 태조 누르하치가 명나라를 몰아내고 중국을 통일한 나라이다. 땅덩이가 넓은 중국이라 많은 이민족과 특히 한족들을 굴복시키는데 어려움이 많았지만 제3대 순치제에 이르러 비로소 ‘청’이라는 국호를 정하게 되었단다.

 

청나라를 굳건하게 만든 황제는 4대 강희황제와 그의 손자 6대 건륭황제란다. 전세계 모든 황제들과 역사속에 존재했던 황제들 처럼 중국의 황제도 정식 황후말고도 후궁들을 거느릴 수 있었는데 서태후는 후궁출신에서 황태후가 된 여자란다.

 

청나라 후궁제도는 황귀비 - 귀비 - 비 - 빈 - 귀인 - 상재 - 답 등의 순서로 나눠지는데 보통 황제의 후궁으로 간택받기 위해 입궁한 처녀들로 이루어졌단다. 이 처녀들은 황제근처에서 황제의 용안을 뵈어야만이 후궁이 될 수 있어 주로 황후나 황태후의 수족노릇을 하며 궁궐에서 대접을 받은 인물들이란다. 

  

1835년 서태후는 산서성 장치현 서파촌의 한 가난한 한족 농민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왕소겸(王小謙)"이었다.
4세 때 장치현 상진촌의 송사원에게 양녀로 팔려가 이름을 "송령아"로 바꾸었으며, 12세 때 다시 노안부 지부 혜징에게 시녀로 팔려가 이름을 "옥란(玉蘭 : 난아 蘭兒라고도 함)"으로 고쳤다.

1852년 예허나라 혜징의 딸이라는 신분으로 궁녀에 선발되어 입궁하였다.
1851년 자희(옥란)는 예허나라씨 중에서 궁녀로 선발되어 그 이듬해 5월 9일 17세의 나이로 입궁하여 귀인에 책봉되었다가 1855년 2월 의빈으로 승격되었다.
1856년 3월 자희는 아들 재순(동치황제)을 출산하여 의비, 즉 비(妃)에 봉해졌다가, 그 이듬해에 다시 의귀비, 즉 귀비(貴妃)에 책봉되었다.
궁녀에서 귀인을 거쳐 귀비에 이르기까지 지위가 계속적으로 상승하면서 그녀의 마음 속에는 정권을 장악하고픈 욕망이 점점 커져 갔다.
1860년 영·프 연합군이 북경으로 진격해 들어가자 그녀는 함풍황제를 따라서 열하(지금의 하북성 승덕)의 피서산장으로 몽진하였다.
이듬 해 8월 함풍황제는 피서산장에서 병사하고 6세의 어린 재순이 황위를 계승하였다.
이에 그녀와 함품황제의 황후 뉴구뤼씨는 황태후로 추대되어, 휘호를 자희(慈禧)와 자안(慈安)이라 하였으니 세상 사람들은 자희태후를 서태후(西太后), 자안태후를 동태후(東太后)라 불렀다.
함풍황제가 죽은 후 의귀비에서 태후로 승격된 서태후는 자신의 야심을 달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서태후는 먼저 자안태후를 설득하기로 하였다.

"지금 남편이 세상을 떠났으니 앞으로 마마나 저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할 것입니다.
재원과 단화, 숙순 등이 정권을 잡고 있는 한 우리에게는 좋은 날이라곤 없을 것이니, 공친왕과 합세하여 정변을 일으키지 않으시렵니까?"
자안태후는 서태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서태후는 자안태후와 함께 수렴청정을 시작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26세였다.

1874년 동치황제는 18세가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동치황제는 병세(매독 : 천연두라는 설도 있음)가 더욱 악화되어 1874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1874년 12월 서태후는 대신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4살밖에 안된 여동생의 아들 재첨을 양자로 삼고 황제(광서황제)로 옹립한 다음 다시 수렴청정을 계속했다. 이로부터 청왕조는 황위의 부계세습 전통이 끊어지게 되었다.
·1881년 동태후가 돌연히 사망하였다. 동태후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의문에 싸여 있다.
일반적으로는 병으로 죽었다는 설, 서태후의 강요로 자살했다는 설, 서태후가 독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1886년 서태후는 영·프연합군에 의해 불탄 청의원(지금의 이화원)을 재건하고, 그 이듬해에 "수렴청정"을 "훈정(訓政)"으로 고쳤다.
·1889년 명분상으로는 광서황제에게 정권을 돌려주었으나 실제로는 내정과 외교의 대권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에서 패한 후 일본과 치욕적인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였다.

·1898년 광서황제는 무술변법을 시행하였다. 그는 유신파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권을 장악하려 하다가 서태후와 갈등을 빚었다.
이에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는 9월 21일 정변을 일으켜 광서황제를 영대에 유폐시키고 담사동 등 유신파 핵심인물 6명을 처형한 후 다시 모든 권력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서태후는 새로운 훈정을 선포하고 광서황제의 폐위를 준비하였으나, 지방의 총독과 외국 사신들의 반대로 광서황제의 칭호만 남겨둔 채 단왕 재의의 아들 부준을 황태자로 삼았다.
·1900년 8월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침공했을 때 그녀는 광서황제를 데리고 서안으로 피신하였다가 1901년 9월 굴욕적인 <신축조약>을 체결하였다.
·1902년 1월 서태후는 광서황제를 데리고 북경으로 돌아와서 다시 그를 영대에 구금하였다.

·1908년 10월 13일 그녀는 74세 생일을 기하여 큰 연회를 베풀었다.
그녀는 여러 날 동안 과식하여 5일째 되던 날 이질이 발병하였다. 아편을 평소 보다 배로 복용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고 그녀를 더욱 여위게 만들뿐이었다.
20일 부의(중국 마지막 황제 : 영화로도 제작되었음)를 후계자로 세운 다음 날 광서황제가 세상을 떠났다.

·1908년 10월 23일 정오에 서태후는 점심 식사를 받고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 의자에 쓰러졌다.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나서 대신들에게,
"이후로 아녀자가 정사에 간여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반드시 엄격한 제한을 두어 각별히 대비해야 하오. 특히 내시가 대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시오.
명나라 말기에 내시가 전횡하였던 일을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오."라는 부탁의 말을 남기고 숨을 가쁘게 몰아 쉬다가 73년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엄마의 역사이야기. 엄마도 역사책 보고 이야기 해주셨다.)


서태후는 아름다운 용모와 뛰어난 두뇌를 가졌다고 했는데 하나도 아름답지 않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용모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오히려 심술쟁이에 고집쟁이로 보인다.


17살에 황궁에 들어간 서태후는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일년동안 노력하였단다.
그러던 어느 하루 그는 황제의 내시들에게 부탁하여 황제가 산책할 무렵 준비하고 있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서태후는 노래를 잘 불렀는데(앞모습은 별로였고 옆모습이 무지 예뻐다고하는데 목소리가 좋아 옆모습을 보이며 달밤에 노래를 불러 황제가 반하도록 했다고, 엄마도 확실하지 않는지 다 믿지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황태후가 된 후부터 매일 경극을 보았고 중국의 경극발전에 아주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고 있단다.

산보를 하던 황제가 은은한 노래소리를 따라 찾아가보니 웬 이쁘장하게 생긴 여인이 사색에 잠겨 노래를 불렀는데 이때로부터 서태후를 알게 되었고 (황궁에 궁녀, 황비가 너무 많기 때문에 황제의 눈에 들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단다) 그리고 왕자를 출산했단다.
역사에 의하면 함풍황제 생전에 서태후는 그렇게 총애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단다. 서태후가
48년이나 중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서태후가 함풍황제의 유일한 아들을 낳아주었기 때문이란다.

 

어쨌든 대단한 여자이기는 하다.

 

(이화원 서태후의 여름별장) 

 

이화원의 면적은 290만 평방미터로 중국 최대의 정원이며 세계에서 조경이 제일 풍부하고(믿기 어렵다) 건축이 제일 잘 보존된 황가원림이라 불린단다. 세계에서 널리 알려진 아름다운 관광지라고 한다.

총면적의 3/4 이 인공으로 판 호수(곤명호)이고 1/4이 호수를 팔 때의 흙으로 만든 일공산(만수산)이란다.(이것은 대단하다. 인공으로 만든 호수에 산이라니 경치가 좋기는 했다.)

 

이화원은 원래 청나라 제왕들의 행궁과 황가림이였으며 원명은 청이원이라고 불렀단다. 1998년 12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이화원의 대규모 재건은 서태후가 했단다. 그래서 이화원을 서태후의 여름별장이라고 부른단다. 1887년 - 1895년 서태후는 500만냥의 해군비용을 청이원을 재건하데 사용하고 이화원이라고 이름을 바꿨단다.

 

이화원이 재건된 후 서태후는 매년 4월이면 이곳으로 와 11월이 되야 자금성으로 돌아갔는데 거의 이곳에서 생활을 해 권력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평생 사치와 향락으로 생활해 중국을 쇠퇴하게 했다고 비난을 받는 여자란다. 그러나 덕분에 오늘날 중국인들은 돈을 벌어 들이고 있다. 엄마 말씀대로 거의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는 것 같다.

 

서태후의 밥을 짓는 수선방만 해도 이화원에 8개 큰 정원이였고, 120명의 요리사가 있었는데 한끼 식사는 60여가지 빵, 30여가지 주식, 128가지 산해진미가 올랐다고 하며 하루식비는 백은으로 3kg으로 당시 이 돈으로 5,000kg의 쌀을 살 수 있었고 만명의 농민이 하루 먹는 음식에 해당되는 양이었단다.

 

(인공으로 팠다는 곤명호)

 

인력거 투어

인력거를 타고 후통이라고 불리는 북경의 골목길들을 둘러 보는 것이다.

길게는 9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북경의 수많은 골목길들을 과거 명,청왕조 시대부터 고관대작들이 살았던 대저택과 북경 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다.

하지만 옛날 귀족들의 집은 공산화 된후 다 나뉘어 그 모습을 보기 힘들었고 지금 서민의 모습은 볼 수 있었다.

 

나는 가이드와 함께 인력거를 탔는데 자꾸 가이드가 어떤 여자와 결혼하고 싶냐고 물었다. 중국에는 4대 미인이 있는데, 누가 더 예쁜 것 같냐는 둥 대답을 안했더니 할 때까지 물었다.

서시(西施)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먹다”

왕소군(王昭君) "기러기가 날개움직이는 것을 잃고 땅으로 떨어지다 ”

초선(貂蟬) "달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다 "
양귀비(楊貴妃)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 '절대가인(絶對佳人)’

 

나는 “머리가 좋고 예쁜 여자랑 결혼할거에요.” 했더니 자꾸 나를 놀리며 사람들에게 다 말해서 부끄러웠다. 인력거투어도 재미있는 여행거리중 하나이다.

우리나라도 이런 여행상품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왕부정 거리의 먹거리 길)

 

저녁에 왕부정 거리를 갔다. 가이드 말이 별의별 음식이 다 있다며 자유롭게 다니고 몇 시에 만나자고 해서 우리 팀은 먼저 먹거리 길로 갔는데 아빠가 갑자기 냄새가 지독하다며 가기 싫다고 하셨다. 가이드 말로는 몇 년 썩은 두부튀긴 냄새라고 했는데 나도 냄새가 지독하기는 했다. 아빠는 끝내 다른쪽으로 도망가시고(너 여기서 절대 뭐 사먹으면 안돼! 알았어? 엄포를 놓고 가셨다. 치이, 혼자 드시기 싫으면 그만이지 꼭 우리한테도 그래..(속으로만 쫑알쫑알)

엄마가 “자기 먹기 싫으면 그만이지 왜그래? 그러지마! 우리 맘대로 할테니까 그냥 가” 하셨다.

 

나와 엄마는 다른 젊은 신혼부부와 함께 구경을 했는데 전갈튀김,잠자리 유충 꼬챙이, 번데기 튀김등이 있는곳으로 가서 구경을 하다 젊은 신혼부부 아저씨와 아줌마가 전갈튀김 먹는 것을 구경하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나한테도 먹어 보라고 강요 비슷하게 하며 여행와서 이런것이 제일 남는것이다. 네가 이것 먹고 나면 다른 것은 하나도 기억안나고 전갈 먹은것만 기억할것이니 꼭 먹어보라고 자꾸 유혹했다.

 

처음에는 망설이다 다시 되돌아와서 전갈튀김을 먹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고소하고 먹을만 했다. 아빠한테 혼날까봐 사진도 찍지 못하게 하고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결국은 엄마가 다 말했다.

“어, **용감한데 잘했어. 아빠도 못하는 것을 하다니 역시 대단한 아빠 아들이다. 여행은 이렇게 하는거야.” 하신다. 혼날줄 알았는데... 아빠는 멋있는데가 많이 있다.

 

이 왕부정거리도 잊지 못할것이다. 잠깐 길을 잃고 엄마랑 헤매다 찾은 거며, 길에 깔린 보도블럭등 좋은 여행이다.

 

 

(마지막 저녁식사)

 

맛없는 중국 음식때문에 나는 고추장에 밥 비벼먹고 있다. 한식집도 맛없고 중국 음식도 맛없고 역시 엄마가 해주시는 음식이 가장 맛있다. 같이 여행온 사람들이다. 엄마와 아빠는 사진 찍어준다며 바쁘고, 다른 사람들은 맥주에 중국 술에 맛있게 먹고 있다.

 

잊지못할 북경여행, 나는 참 행운아다. 멋있는 부모님 만나서 자주 여행을 가고 모르던 세계를 알아가고 부모님께 감사하다고 인사드렸다.

지금 람세스를 읽고 있는데 엄마한테 이집트에 가자고 살짝 이야기 했다. 우리는 여름방학때 터키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엄마는 아빠한테 한달내내 나와 툴이서 터키여행을 할거라 했더니 아빠가 펄쩍 뛰면서 미쳤다고 했다.(먼저 아빠가 혼자서 말레지아 가신다고 했으면서) 그리고 엄마보다 더 열심히 터키를 찾아 보시고 계신다. 정말 여름방학이면 터키에 가게 될까?

 

이럴때마다 엄마가 나에게 협박을 하는 말중 “너 영어공부 열심히 안하면 콧물도 없어! 너만 빼놓고 갈거야.”